(시사저널=오유진 기자)
울산 토종 기업인 HD현대는 2022년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에 글로벌 R&D센터를 설립했다. 전국에 흩어진 17개 계열사 연구 인력을 한곳에 모아 그룹 전체의 기술 경쟁력을 강화하겠다는 취지다. 현재 분당구 정자동 사옥에는 조선·중공업 분야를 포함한 약 5000명의 연구 인력이 근무 중이다. 본사는 여전히 울산에 있지만, 핵심적인 기술 연구는 수도권에서 이뤄지는 셈이다.



정부가 '일자리 첫걸음 보장제' 추진 방안을 발표한 9월10일 서울 시내 한 대학일자리플러스센터에서 취업 정보를 살펴보는 학생들 모습 ⓒ연합뉴스


포스코도 2 과대출자대출 022년 지주회사 포스코홀딩스를 설립하며 본사 서울 이전을 추진했다. 그러나 '포스코의 전신인 포항제철의 정체성을 훼손하고, 지역과의 상생을 저버린다'는 지역주민들의 항의에 본사 이전을 철회했다. 포스코는 최근 경기도 성남시 위례지구에 첨단기술 연구소인 '포스코 글로벌센터'를 신설한다고 밝혔다. 형식상 본사는 포항에 두지만, 연구개발(R&D) 역량은 사실상 주택전세자금 수도권에 결집시키겠다는 시도로 해석된다.
지방을 떠나 새로운 터전을 찾는 건 사람만이 아니다. 지역에 뿌리를 두고 사업을 추진하는 기업들조차 인재 확보의 벽에 부닥쳐 수도권 이전을 고심하고 있다. 생산시설은 지방에 두되, 고급 인재 수혈이 필요한 본사나 연구개발 조직은 수도권으로 이전하는 것이 최근 지역 기반 기업들의 추세다. CEO스코 제조원가 어에 따르면, 국내 500대 기업 본사 77%는 수도권에 집중돼 있다. 이 중 두산에너빌리티, HD현대중공업, 카카오 등은 각각 경남 창원, 울산, 제주에 본사를 두고 있다. 이들마저도 최첨단 기술을 담당하는 '핵심 조직'은 모두 수도권에 있다.
인공지능(AI), 정보기술(IT) 등 첨단 분야의 수도권 편중은 더욱 심각하다. 한국지역고용학 채무통합 회 연구에 따르면, 국내 연구개발비의 70.1%가 수도권에 집중돼 있다. 연구개발 인력(63.7%)은 물론, 기업 내 연구 전담 부서(68.1%)까지도 수도권에 쏠린 것이 현실이다. 시사저널이 시가총액 상위 20대 기업(금융·공기업 제외)의 연구소 소재지를 조사한 결과, 지방에 기업 핵심 연구조직을 둔 기업은 해운물류 기업인 HMM(부산)이 유일했다. 전국 위례 자이 각지에 사업장을 둔 4대 그룹(삼성·SK·현대차·LG) 역시 핵심 거점은 모두 수도권을 벗어나지 않는다.



구직자, '일할 곳' 대신 '살 곳' 택한다
지방에 거점을 두고 지역경제를 책임졌던 기업들이 하나둘 서울로 향하는 건 더 이상 지역에서 필요한 고급 인재를 채용할 수 없기 때문이다. 고학력·고연봉의 기술직을 채용하는 업계에서는 "서울 출퇴근이 가능한 경기도 성남, 화성을 기점으로 인재가 내려오지 않는 '인재 남방한계선'이 형성됐다"는 자조 섞인 목소리가 나온다.
이 같은 '인재 블랙홀'은 더 이상 '일자리'가 '살 자리'를 결정하지 않는 현실에서 비롯됐다. 고소득 일자리를 찾아 거주지를 결정하던 시대가 끝났다. 살 수 없는 곳에서는 일하지 않겠다는 청년들의 의지가 반영된 결과다. 2022년 대한상공회의소 설문조사에 따르면, 구직자들은 회사 입사 시 연봉(36.5%)과 근무지역(28.9%)을 가장 중요하게 평가한다고 밝혔다. 응답자 34.5%는 조건이 아무리 좋은 회사여도 지방에 있으면 지원조차 하지 않는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지방 근무를 꺼리는 청년이 늘어나니 기업들도 구직자들을 따라 서울행을 택하는 셈이다.
특히 고급 인재를 필요로 하는 대기업일수록 이 같은 '수도권 쏠림' 현상이 뚜렷해지고 있다. 석·박사급 고학력 인재 확보는 서울의 대기업들조차 경쟁을 벌이고 있다. 때문에 파격적인 연봉을 제시해도 지방 근무를 택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경기도에 연구소를 둔 H사 관계자는 "지방 공장에서 석·박사급 연구 인력을 상시 채용 중인데, 1년 동안 지원자가 10명도 모이지 않았다"며 "최고급 인재들이 한국을 떠나 해외로까지 나가는 상황에서 지방에 인재를 끌어오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토로했다.
인재가 떠나고, 기업도 떠나니 지방에서 양질의 일자리를 찾는 건 하늘의 별 따기 수준이다. 통계청에 따르면, 좋은 일자리(전국 평균임금 이상·직업 내 임금 상위 20% 기준)의 수도권 집중도는 2015년 21.3%에서 지난해 27.1%로 10년 새 5.8%포인트 상승했다. 기업이 아무리 많은 일자리를 창출해도, 결국 '좋은 일자리'는 수도권에만 몰린다는 뜻이다.



주무현 지역산업경제연구원장은 "산업구조가 IT·AI 중심으로 재편되면서 지식 기반 산업 연구소들이 일제히 판교로 몰렸고, 그 결과 수도권에 또 하나의 거대한 클러스터가 형성됐다"며 "과거에는 기업이 있는 곳에 사람이 모였지만, 이동성이 높아진 지금은 기업의 존재만으로 사람을 끌어들이기는 어렵다"고 지적했다.
기업들이 '지방 탈출' 러시를 이어가는 동안, 정부가 이전한 공공기관들은 '유턴'조차 하지 못한 채 인재난에 허덕인다. 2017년 핵심 조직인 기금운용본부를 전주로 이전한 국민연금은 지방 이전 이후 매년 30여 명이 줄퇴사해 정원을 채우지 못하고 있다. 한때 10대 1에 달했던 기금운용본부의 채용 경쟁률은 올해 7월 기준 3대 1 수준으로 떨어졌다. 지난해 5월 경상남도 사천시에 문을 연 우주항공청은 공무원 보수 기준을 뛰어넘는 억대 연봉을 제시했음에도 개청 1년이 넘은 지금까지 정원(293명)을 채우지 못한 상태다.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는 2017년 전라북도 전주로 이전하면서 운용역 확보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연합뉴스


"사람이 있어야 기업이 남는다"
전문가들은 기업의 '지방 탈출'을 막기 위해서는 결국 기업이 원하는 인재를 지역에 배분하는 정책이 선행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산업단지를 조성해 국토를 균형발전시키는 공급 중심의 정책에서 벗어나, 지방에 사람이 먼저 머물 수 있게 만드는 '인재 균형 정책'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고급 인재들이 지방에 머물면, 인재가 필요한 기업은 자연스럽게 지방으로 유턴하는 선순환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김종한 경성대 경제금융물류학부 교수는 "지역 인재를 양성하는 정책은 지방소멸이라는 '밑 빠진 독'의 밑을 메울 수 있는 최우선의 방법"이라며 "인재를 유치해 '밑'을 메우지 않으면 다양한 정책을 시도한들 물이 고일 수 없다"고 전했다.
일각에선 기업 이전이나 연구소 유치 등 인위적인 이전 정책보다, 지역에 뿌리를 둔 중소·중견 '뿌리 기업'의 자생을 돕는 것이 효과적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마강래 중앙대 도시계획부동산학과 교수는 "산업단지 조성, 보조금 지급, 세제 혜택 등으로 지역을 살리는 것은 이미 실패한 전략임이 드러난 지 오래"라며 "이제는 지방 곳곳에서 지역경제를 떠받치고 있었던 뿌리 기업으로 눈을 돌려야 한다"고 말했다.
마 교수는 대표적인 사례로 독일 소도시의 자급자족에 이바지하는 '히든챔피언'을 꼽았다. 히든챔피언이란 매출은 대기업보다 작지만, 글로벌 틈새시장(니치 마켓)에서 괄목할 만한 영향력 또는 기술을 가진 강소기업을 뜻한다. 한국지역학회 논문에 따르면, 현재 독일 내 히든챔피언 40%는 인구 2만 명 이하 소도시에 자리 잡고 있다.
그는 "독일은 지역마다 거대한 산업단지를 조성하는 대신, 지역 중소·중견기업이 자력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기초 토양을 다지는 일에 중점을 뒀다"며 "지역 내 대학·직업훈련기관과 연계해 인력을 교육하고, 배출된 인재는 기업에 즉시 투입하는 방식으로 기업이 지방에 머무를 이유를 만들어준 것"이라고 설명했다.
마 교수는 이어 "기업이 지역에 남아 일자리를 제공하지 않으면 주거 대책, 인구 대책을 아무리 추진해도 백약이 무효"라며 "지방에 남아있는 '잡은 물고기'를 집중적으로 지원하는 방향으로 정책을 전환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주 원장도 "진정한 맛집은 단 하나의 메뉴로 승부를 본다"며 "온갖 산업에 발을 걸친 채 기업을 우후죽순 유치하는 방식을 버리고, 지역이 가진 강점 하나를 집중적으로 육성해 인재와 기업을 동시에 끌어들이는 '선택과 집중'이 필요하다"고 전했다.